과거사

제주4·3 사건 최초의 무죄, 제주4·3 군사재판 희생자들의 70년 한을 풀다

제주지방법원 2018. 9. 3.자 2017재고합4 재심개시결정

제주지방법원 2019. 1. 17. 선고 2017재고합4 판결 외 다수의 무죄 판결

판결문 링크 :

https://www.law.go.kr/precSc.do?menuId=7&subMenuId=47&tabMenuId=213&eventGubun=&query=2017%EC%9E%AC%EA%B3%A0%ED%95%A94#licPrec205622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이 바로 제주 4·3 사건입니다. 그 4·3사건의 희생자 중에는 민간인 신분임에도 군사재판에 끌려가 내란죄, 국방경비법 위반과 같은 죄명으로 유죄를 선고받은 이들이 2500여명 정도 있으십니다. 이분들은 이후 육지 형무소로 가 행방불명되거나, 출소해 돌아와서도 평생 전과자의 낙인 속에서 고통 속에 숨죽여 살아오셨습니다. 1948년 12월, 1949년 6-7월 제주에서 이루어졌던 이 민간인에 대한 군사재판은 사실상 법의 탈을 쓴 무도한 처단 절차였습니다. 헌법과 형사소송 절차가 전혀 지켜지지 않았음은 물론, 고문과 불법구금 속에서 재판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절차도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희생자들은 재판과정에서 한마디 하지도 못했고, 본인들의 형량도 육지의 형무소에 가서야 알았다고 증언합니다. 판결문조차 확인되지 않는데, 이는 그만큼 재판절차가 위법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4·3 군사재판 희생자들은 이후 재심을 통해 억울함을 밝히고자 했지만 판결문조차 없는 상황에서 여러 난관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유죄’라는 낙인 속에 ‘저 사람들을 무슨 일을 했기에 재판에서 유죄가 나온 것이겠지’ 하는 부당한 사회적 시선도 존재했습니다.

2016년 제주4·3도민연대라는 제주지역 시민단체와 18명의 4·3 군사재판 생존희생자분들이 해마루에게 연락을 해주셨습니다. ‘죽기 전에 제대로 된 재판을 한 번 받게 해달라’라 요청이셨습니다. 여러 과거사 사건을 수행하면서 전문성을 갖춘 해마루였기에 믿고 맡겨보겠다 하셨습니다. 해마루는 이후 여러 학자, 과거사 전문변호사들의 자문을 거쳐 재심이 가능한 법리를 고안하였고, 2017. 4. 재심청구서를 접수하였습니다. 4·3 사건과 관련한 최초의 재심청구였습니다.

이후 치열한 법정 공방이 이어졌습니다. 해마루는 재판과정에서 여러 국가기관에게 광범위한 사실조회를 신청하여 당시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기록들을 확인해 증거로 제출하였고, 관련 전문가를 증인으로 법정에서 신문하여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재판부에 설득력 있게 전달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재심청구인 18명 중 진술이 가능한 17명 모두 90세 전후로 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법정에서 70여 년 전 본인들이 겪고 당한 위법한 재판과 고문, 구금을 진술했습니다. 그 결과 2018. 9. 4·3 사건 역사에서 최초의 재심개시결정이 이루어졌고, 뒤이어 2019. 1. 사실상의 무죄판결인 공소기각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피해자들의 누명이 벗겨져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고, 적절한 보상까지 이루어지는 과정에, 해마루가 함께 했습니다.

최초의 판결 이후 4·3 군사재판 희생자들의 재심청구가 이어졌고, 군사재판을 넘어 4·3 사건 시기 일반재판에 대한 재심청구도 이루어졌습니다. 그 과정 역시 최초의 판결을 이끌어낸 해마루가 함께 했습니다. 이렇게 희생자들이 법원의 문을 두드리며 명예회복을 외치자 결국 「제주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의 전부개정으로 이어졌습니다. 특별재심, 직권재심 절차가 도입되면서 현재는 국가의 조력으로 훨씬 간이하게 재심절차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어렵다, 불가능하다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던 4·3 군사재판 재심사건에서 해마루는 가장 성공적인 결과는 만들어냈습니다. 그 재판이 마중물이 되어 입법적 변화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해마루는 2023년 현재에도 제주에서 많은 군사재판, 일반재판 희생자들의 재심사건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하는 첫 번째 재심사건에서 해마루의 최후변론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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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재판장님, 피고인들은 무죄입니다.

피고인 김평국, 현창용, 오희춘, 부원휴, 오계춘, 조병태, 양일화, 박내은, 임창의, 한신화는 1948년 12월경 제주도계엄지구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어 구 형법 소정 내란죄 유죄를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재심개시절차 및 본 공판절차에서 확인된 것과 같이, 당시 수사과정은 불법구금과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강요였고, 재판과정은 차마 재판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위법한 절차였습니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만을 바탕으로, 당시의 고등군법회의는 방어의 기회를 보장하기는커녕 이름조차 부르지 않은 채 피고인들에게 유죄를 선고하였습니다. 피고인들은 이 법정진술에서 “제대로 된 재판이라도 받고 감옥에 갔으면 억울하지라도 않겠다, 왜 나를 감옥에 보냈던 것인지 묻고 싶다”며 오열하였습니다.

역사를 보면 당시 왜 이런 위법한 수사와 재판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1948년 11월 17일 선포된 계엄하에서 제9연대는 “모든 중산간 마을 주민들이 유격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을 가지고 중산간마을 지역에 대한 초토화작적을 시작합니다. 43사건위원회 보고서는 이 작전을 ‘대량학살계획’이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그 학살계획 속에서 1948년 군법회의 피고인들은 대부분 중간산지역에 살았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폭도로 몰렸습니다. 즉, 초토화작전이라는 학살계획 속에서 죽지 않고 체포된 사람들을 ‘처리’하는 방식으로, 군사재판의 절차를 활용한 것이고, 그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면한 사람들은 육지의 형무소에서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만 했습니다. 총에 의한 처형이 아닌 법에 의한 처형이었습니다.

1949년 7월에 열린 고등군법회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피고인 정기성, 현우룡, 오영종, 박동수, 양근방, 김경인, 김순화, 박순석은 1948년 12월 초토화작전을 피해 산으로 피했던 중산간지역 2만 명의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피고인들은 다음해인 1949년 봄에 뿌려진 귀순 전단지를 보고 산에서 내려와 자수하였지만, 이들을 기다린 것은 ‘폭도’, ‘산에서 무엇을 했느냐’, ‘봉화를 올리지 않았냐’, ‘무장대에게 밥과 돈을 주지 않았냐’라는 질문과 매질이었습니다. 결국 1949년 군법회의 피고인들은 국방경비법 소정 간첩죄, 이적죄의 혐의가 적용되어 모두 유죄의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 어떤 증거도 없이 고문과 불법구금에 의한 허위자백만을 근거로 위법한 재판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는 1948년, 1949년 군법회의의 위법성은 모두 동일합니다.

즉, 1948년 12월 선고된 10건, 1949년 7월 선고된 8건의 유죄판결은 제주4·3사건 당시 민간인들을 적으로 몰아, 문명국가가 사법절차에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기준도 지키지 않은 채, ‘적’을 처리하기 위한 작전처럼 이루어진 위법한 판결인 것입니다.

2003년 발간된 제주43사건위원회의 보고서에는 1948년, 1949년 군법회의의 불법성에 대해서 분명히 지적하였으나, 구체적인 이후 조치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2007년 제주4·3특별법의 개정으로 피고인들과 같은 군법회의 희생자들이 ‘수형인 희생자’라는 항목으로서 희생자로 인정되어 의료비 명목으로 약간의 보조금은 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역시 형사판결 무효화 등의 궁극적인 해결책으로 이어지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행정부와 입법부가 자신의 역할을 방기하고 있는 사이 군법회의 2530여 명의 희생자 중 생존자는 30여 명에 불과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피고인들은 그렇게 사법부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2016년 초 변호인으로서 피고인들을 처음 뵈었을 때, 피고인들께서 30대 중반의 변호사인 저에게 고개 숙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죽기 전에 재판 받게 해주십시오.” 저 역시 머리 숙이며 “노력하겠다”라고 말씀 드렸지만 사실 자신이 없었습니다. 이후 여러 연구자, 실무자분들과의 논의 속에서 결국 ‘재심’으로 구제절차를 정하고 2017년 4월 재심청구를 접수하였습니다. 청구서를 접수하면서, 피고인분들께서는 이제야 재판을 받게 되었구나 하셨지만, 저를 포함한 변호인들의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습니다. 판결문도 없고, 온전한 재판의 꼴도 갖추지 못하였던 4·3 군법회의에 대한 재심을 사법부가 받아들일까?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이분들의 생전에 명예회복을 하시는 것이 가능할까? 재심 개시 여부만을 두고 대법원까지 다투며 오랜 시간이 지나가 버리는 것은 아닐까?

다행히, 재판부의 현명하신 판단과 검찰의 즉시항고 포기로, 올해 2월부터 시작된 4·3 군법회의 재심이라는, 4·3사건 관련 최초의 재심절차가 연내에 종결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8분 피고인들을 대신해 감사드립니다. 김평국 할머니께서는 재심개시절차에서는 “20년만, 아니 10년만 일찍 이런 기회가 있었다면 춤을 추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늙었다. 너무 늦었다. 이제와서 명예회복을 하고, 무죄를 받는다고 해도 내가 겪은 고통이 풀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라고 하셨습니다. 김평국 할머니의 일생을 돌아보았을 때 너무 늦은 결정임을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늦은 결정이라도 막상 재심개시결정이 나오자 김평국 할머니께서는 “이제야 좀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머리를 들고 다니게 되었다” 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부디, 재판부께서 피고인 18명 모두가 남은 생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피고인들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